REPORT
내가 본 2004 S/S 서울컬렉션위크
- 작성일200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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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살고 있는 나는 사실 여러 패션 관련 행사에 참여할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었다. 에스모드에 들어와서 지난 시즌 서울 컬렉션위크를 본 것이 나의 첫 패션 쇼 관람이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처음 본 쇼는 실망스러운 점이 있었다. 관객들이 너무 많아서 쇼를 제대로 볼 수 없었고 기억에 남는 건 모델들의 얼굴 뿐이었다. 아쉬움이 컸던 터라 이번에는 확실하게 보고 많이 배우리라 다짐을 하고 이번 서울 컬렉션위크에 참가하였다. 나는 운이 좋게도 디자이너의 작품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헬퍼로 쇼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여러 패션 보도에서 백스테이지 광경을 묘사할 때 전쟁터에 비유하는 글을 많이 봐서인지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지레 겁을 먹었지만 막상 겪고 보니 기쁨과 보람이 많이 남는다. 첫 날 우리가 맡게 된 쇼는 박윤정 디자이너의 쇼였다. 워낙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젊은 디자이너였고 내가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디자이너였기에 내 흥분은 배가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뮤지컬이나 영화 의상에 관심이 많아 그에 대한 작은 자료라도 놓치지 않고 모아두는 편인데 박윤정 디자이너가 의상을 맡았던 ‘단적비연수’나 ‘토요일 밤의 열기’ 는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녀의 쇼에 대한 기대가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자세히 본 그녀의 옷들은 작은 곳 하나에도 섬세한 디자인이 숨겨져 있었고 실크 쉬폰과 저지 소재에 부드러운 파스텔 컬러를 사용하고 그 안에서 보이는 꼼꼼한 스티치와 자수는 나로 하여금 감탄을 멈추지 못하게 하였다. 그 쇼의 주제가 연이었다는 것은 쇼가 끝나고 설명을 들은 후에야 안 사실이다. 사실 중국 연을 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으니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그냥 막연히 ‘오리엔탈리즘을 이번 쇼에도 선보이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정도였는데 막상 설명을 들어보니 연의 구조와 기능을 디자인에 응용한 것이었다. 미리 알고 보았으면 더 자세히 디자인이 의도된 바와 컷팅된 패턴의 의미를 좀 더 재미있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 도시에에서 나도 섹시 오리엔탈리즘을 주제로 디자인을 해 본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오리엔탈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동양적인 문양이 들어간 소재를 이용해서 단순하게 디자인을 해 봤던 것이 전부였는데 박윤정 디자이너는 동양의 연을 모티브로 연에서 볼 수 있는 선이나 그 구조를 의상에 접목시키거나 하늘을 나는 느낌을 소재의 부드러움으로 표현하는 등 좀더 자세한 관찰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주제를 더욱 재미있고 신선한 느낌으로 표현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남들과는 다른 생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키워나가는 연습을 해야만 좀 더 재미있고 새로운 디자인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배운 쇼였다 . 모든 디자이너의 패션쇼 하나 하나가 기억에 남지만 사실 내가 헬퍼로서 가장 고생을 했던 의상은 홍은주 디자이너의 의상이었다. 옷을 받아 든 헬퍼들의 얼굴에서는 난감함이 역력했고 디자인 팀에서 오신 분들도 헬퍼들에게 이것 저것 설명을 하시면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여름 밤 깊은 숲에서 만날 것 같은 벌레들이 액세서리와 옷에 붙어 있었고 어지러운 컷팅의 의상과 툭하면 뜯어질 듯한 손바느질, 앞인지 옆인지 구분이 힘든 망사와 쉬폰 소재의 옷들, 관리는 그렇다 치고 착장마저도 난해한 레이스 악세서리 등 여기 저기 디자인 팀을 부르는 헬퍼들의 목소리로 정말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리허설 때에는 헤어가 끝나지 않은 상태이어서 옷을 입고 벗기에는 불편함이 덜 했는데 쇼 시작 전에 모델들의 머리를 보고 헬퍼 모두는 쓰린 눈물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모두 머리에 긴 나뭇가지를 꽂고 온 것이었다. 서로 허망한 눈길을 나누며 디자이너를 살짝 원망했다. 하지만 쇼가 끝난 후 모니터를 통해 본 쇼는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풀벌레 소리가 가득 울리고 하얀 나무가 스테이지 가운데 서 있고 신비스러운 모델의 눈빛까지 분위기를 더했다. 우리가 힘들게 입힌 옷들과 악세서리가 무대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마치 세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에서 모두를 환상에 젖게 했던 그 숲속 같은…. 모두들 고생해서 이 환상적인 쇼의 숨은 주역이 된 것 같아 보람이 남는 쇼였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디자이너는 따로 있었다. 지난 서울패션위크에서 처음 보고 신선한 충격에 구구절절 그 쇼에 대해 적어 놓았던 ‘엔젤펑크’. 그 디자이너의 쇼를 실제로 보게 되고 게다가 디자이너를 만나게 되다니 나의 감격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원지해 디자이너의 패션쇼는 젊음 넘치는 열정과 위트가 가득한 말 그대로 신선한 쇼였다. 처음 오프닝은 달타령과 아리랑으로 이어지는 음악에 우리 전통의 삼베 모시를 소재로 한 디자인이 선보였지만 모델들의 퇴장과 동시에 스케이트 보더들의 스피디한 장애물 넘기가 시작되었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장애물을 넘는 보더들의 아마추어적인 모습은 진정으로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 실수하는 그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통일된 것은 뚜렷이 없었다. 하지만 젊은 감성은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다른 성격의 퍼포먼스가 달리 어색하지 않았던 것, 이것이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이 추구 하는 퓨전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르다고 섞이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듯 원지해의 쇼는 즐거웠다. 섞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나, 정해놓은 것만 섞는 그 몹쓸 버릇을 이번 쇼를 통해 고쳐야지 생각해본다. 사실 무엇 하나 나를 놀라지 않게 한 쇼는 없었다. 모든 옷을 일일이 자신이 체크하면서 수선하고 모든 헬퍼들에게 ‘아리가또’를 잊지 않았던 수줍은 미소의 어린 디자이너 유키 사나야, 아름다운 자연의 빛 블루를 너무나 로맨틱하게 보여주었던 디자이너 홍미화, 블랙과 화이트의 모던한 조화가 인상적이었고 우리들에게 가장 자상하게 대해 주신 것이 기억에 남는 심설화 디자이너… 다시 떠올리는 이번 서울 컬렉션은 지금도 나에게 작은 떨림을 선물한다. 긴장감 가득했던 쇼 오프닝 전의 백스테이지는 나에게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을 이루기 위한 원동력으로 오랫동안 함께 할 것이다.
